2010. 5. 14. 22:31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꼿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봄이지만 햇살을 보면 어디선가 매미가 울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찡그린 얼굴에 책으로 그늘을 만들며 '개미가 지혜로웠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 보도블럭 사이에서 소복한 모래 언덕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미들이 부지런히 쌓아올린 작은 모래 언덕입니다. 개미가 겨우내 묵었던 집공사를 하고 있나봅니다.
자세히 보니 벌써 쌓은 모래는 노랗게 말라있었고 방금 입에 물고 나온 모래에는 살짝 습기가 배어있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흙이 삽을 잘 받아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개미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해가 뜨기 전,
흙이 머금은 고마운 습기를 햇살이 모두 날려버리기 전에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연못 옆 벤치에 가 앉았습니다.
자연관찰을 한다며 견학을 나온 초등학생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거미는 다리가 8개니 동물이고 메뚜기는 다리가 여섯개니 곤충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미가 동물인지 곤충인지 별고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들의 시선은 바람따라 조용히 부유하는 민들레씨를 타고 분수대로 향합니다.

쏴..쏴...
 
분수대가 뿜어 올린 물은 하얀색 고리를 그리며 연못으로 떨어집니다.
물방울이 채공하는 시간은 3초. 짧은 시간동안 물방울은 무지개를 만들고 있습니다.
물방울도 알고 있습니다.
햇살이 있을 때, 
분주히 움직여야 무지개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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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 22:30

 

모든 생명체는 어미의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작은 점을 하나 찍는다. 그 점은 곧 구르기 시작하고 의미라는 것을 찾고자 방향성을 갖게 된다. 점이 굴러간 곳에는 흔적처럼 실선이 그려지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굴러다니다가 어디 시점에 다다르면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진다. 죽음이다. 그렇게 점은 찍히고 구르며 마침내 사라진다. 이렇게 점이 구른 흔적을 우리는 인생이라 부른다.

 

‘태어나다’와 ‘죽는다’ 사이에는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삶이라는 것은 이 땅에 얼마 간 머문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우리가 머무는 이 땅은 누구나 마음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푹신푹신하고 평평하기만 한 곳이 아니다. 이 땅은 거칠고 경사진 곳 이다. 거칠기 때문에 상처 입고, 비탈지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는 그런 곳이다.

 

푸구이의 점은 비탈길의 꼭대기에 있었다.

2010. 4. 1. 22:29
"똥을 누다가 오줌이 나오면 이제 더 이상 나올 똥이 없다는 표시야. 하나님이 사람에게 화장실에 마냥 앉아있지 말라고 그렇게 '똥 다눴다'는 표시를 주신거지"
그 뒤로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똥을 눈 후 오줌이 나와야 비로소 모든 일이 끝마쳤다고 생각했다. 
때론 이놈의 오줌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오줌이란 놈으로 마무리를 짓고 나오지 못했을 때는 나는 내 몸이 혹시 고장난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괜스레 불안 불안할 때도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대변을 본 후, 오줌을 찔끔 싸고 다섯 칸의 휴지를 조심히 세어 두세번 재빨리 접은 다음 어머니께 갔다.

바지 춤을 무릎까지 내리고 고개를 숙이니 다리사이로 어머니가 보였다.
다리 사이로 보이는 어머니는 항상 엄숙 했다.
정성스럽게 휴지를 접어 내 엉덩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똥구멍을 닦아주시는 어머니는 언제나 매우 진지해 보였다.
그럴때면 나 역시 진지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표정은 알게 모르게 따라하게되는 전염되는 그런 성질이 있는 것 같다.

다리 사이로 내민 내 얼굴에는 아마 피가 몰려 다소 힘들어 보였을 것이다.
어느날 어머니는 내 발간 얼굴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니가 닦아 봐."
그리고 내 손에 휴지를 쥐어 주셨다.

왼손잡이인 나는 어머니가 휴지를 쥐어주신오른손으로 부자연 스럽게 뒤처리를 했고,
어머니는 조용히 지켜보시더니 다시
"엎드려" 하신 후 다시 한 번 닦아주셨다.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닦아주셨던 분이다.
나는 어머니 얼굴앞에 냄새나는 엉덩이와 달랑거리는 고추를 내밀고도 창피한 줄 몰랐다.
지금이라면 어디 상상조차 할 수 있는 일일까?
남들이 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지한 얼굴로 내 엉덩이를 닦아주셨던 어머니의 표정이 가끔 그립다.

"다 닦았다!"

말씀하시며 한 쪽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때려주시던 그 손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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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31. 22:28
비가 내린다. 우산을 들고 있어, 시선 역시 아래로 내려온다.
양 발은 번갈아 가며 바지 자락으로 빗물을 퍼나르고 젖은 바짓단은
정강이에 달라붙어 습습한 기운에 소름이 돋는다.

비가 오면 '평소 같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평소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멍하니 먼산을 보며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걸어갔다면,
비가 오는 날은 조금 다르다. 

시야가 우산 아래 갖힌다. 시야의 초점이 당겨지면 집중하게 되고 오감이 일을하기 시작한다.
우산에 하늘이 가려지고 뽀얗게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며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호흡하고 있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
소리 없이 이루어지던 것이
하얗게 눈으로 보이면 귀로 들리고 온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콧구멍은 아래서 위로 뚫려있는터라 내리는 빗방울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공기만을 흡입할 수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만약 콧구멍이 굴뚝과 같이 위로 뚫려 있었다면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이 걸었다가는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날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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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3. 22:27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13)


소망이란 비전을 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비전이 생기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비전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살아 있지만 내일에 대한 아무런 소망과 비전이 없고 그저 죽고 싶습니까? 성령을 사모하시길 바람니다. 성령은 죽은지 아무리

오래된 뼈라도 능히 살리고 소망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늘 넘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여 두려워하라, 평범한 죽음을 中

2010. 3. 3. 22:26


요즘 아이들이 매일같이 놀러온다.


시끄럽다. 귀찮다.


이제 교회 건물이 좁다고 생각 된다.


콱 그냥 쫓아 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


아이들을 쫓는게 옳은가?


아이들이 교제할 수 있는 교육관을 달라고 기도하는게 옳은가?


옳고 그른것을 떠나서 어떤 것이 더 생산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을까?




그래, 


너도, 오고, 너도 와라, 


집에서 틀어박혀서 컴퓨터랑 놀지 말고


교회로 오려무나.


와서 창문도 두어장 깨고, 울고 웃고 떠들어라.


너네도 좁다고 느낄 그 때,


잠깐만 같이 무릎꿇고 기도하자꾸나.


하나님 교회가 좁아요.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는 교육관 하나만 주세요 하고 말이다.


선생님 먼저 무릎꿇고 있을게.

2010. 2. 22. 22:26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두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겉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에 깔아놓고 있다. 그렇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제서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몇 일 후, 예수님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찌된 일일까? 그 몇 일 사이에 모두 어디라도 간 것일까? 그 곳은 분명 얼마 전 예수님이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던 예루살렘이였는데, 예수님은 결국 그 곳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

 

지금 혹시 주님이 주신 감격과 은혜에 감사하여 두 손에 '예수님 만세'라고 적힌 깃발을 정렬적으로 흔들고 있는가?

높이 든 손이 자랑스럽고,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오는가?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같았다.

아마 그들도 온 힘을 다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을 것이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맞이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더 크게 찬양했고, 더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몇 일 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오늘 무슨 깃발을 흔들고 있는가? 예수님 만세인가?

좋다. 그렇다면 당신의 품 속에 감춰놓은 또 다른 깃발은 또 언제 흔들 생각인가?

이를 테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와 같은 깃발 말이다.

 

세상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흔드려고 감춰놓았는가?

아니면 회사? 학교? 그 밖에 어떤 필요 적절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왕 노릇을 하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내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다.

 

우리가 평생 들고 흔들어야 할 깃발, 예수 그리스도.

내 삶을 바친다고, 나를 받아달라고 그럴듯한 말들을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품 속에 몰래 감춰 놓은 '세상'이라고 적혀 있는 그 깃발.

 

이제 그 깃발을 꺼내서 태워버려야 한다.

 

내 손에 흔들 깃발이 오직 한가지, '예수' 밖에 없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예수를 나의 왕으로 맞아들였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