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백지의 도전

2010.01.26- 스펙쌓고 있습니까?

마실꾼 2010. 1. 26. 22:15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그 아이는 머리가 훌렁 벗겨지시고 구수한 경상도식 영어발음을 구사하시는 선생님께 영어라는 것을 처음 배웠습니다. 영어책 첫 장 LESSON 1 ‘Hi Tom’을 배울 때였습니다. 영어 선생님께서는 누가 How are you? 하고 물으면 I`m fine 이라고 대답하면 문제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때 I am fine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교실 뿐이였습니다. 당시 나라의 경제 상황은 I am fine 이라고는 물었을 때 I am fine. 이라고  말하면 (누구냐, 넌?)이라고 되물어 올 정도로 도저히 ‘fine!’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IMF때문이였습니다. 그 당시 아이는 IMF가 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만 몰랐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반에서 가장 똘똘하다는 친구 근원이에게 IMF가 뭐냐고 물었더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이라 그런거 몰라도 된데”라고 말하며 자신은 몰라도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니 전혀 창피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던 걸로 아이는 기억하고있습니다. 


그맘 때 아이의 집에 한 아저씨가 찾아왔습니다. 은색 빛이 나는 멋있는 양복을 차려입은 아저씨였는데,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그때만해도 흔치 않았던 휴대폰을 들고 있었습니다. 번지지르한 모습이였지만, 문제는 그 아저씨의 눈빛이였습니다. 그 아저씨의 눈 빛을 아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눈 빛은 마치 카운터 펀치를 맞고 KO 중인 권투선수의 맥 풀린 눈 같았는데, 그 눈 빛으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밥 한 그릇만 주렴.”


맞습니다. 분명히 그 아저씨는 아이에게 밥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회사에 가셨고, 어머니는 외출하고 안계셨습니다. 낯 선 사람을 집에 들이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그 아이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저씨를 집에 들어오시라고 해서 어머니가 재워놓으신 커타란 고등어 두 손을 굽고, 평소 먹던 이런 저런 반찬을 꺼내서 아저씨께 초졸한 상을 차려드렸습니다. 맙소사 고등어 두 손과 밑반찬을 포함해서 밥이 몇 공기였더라.. 아무튼 그 아저씨는 아이의 눈 앞에서 모든것을 싹 먹어치웠습니다. 아이는 겉으로는 놀란 기색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직 순수했던 때라 그것을 잘 숨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아저씨가 눈치 챘나봅니다. 아이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적잖게놀랐다는 것을요.


“걱정마 숟가락은 안 먹을거야.”


정말로 숟가락 빼고 모든 것을 다 드신 아저씨는 졸린 눈으로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저씨는 00은행에서 일했었어. 이 주일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회사 들어온지 이제 삼 년차에 접어들었는데 그 놈의 IMF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이제 직장이 없어졌단다. 회사에서 나와서 이 주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가고 걸어다녔지 뭐니. 집에 안들어간 것이 아니라 못들어 간거야. 그게 말이다 정말로 못 들어가겠더라고, 그 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는거야, 우리 마누라와 이제 막 꼬물꼭거리는 내 딸 (내 딸이름은 지혜란다) 눈을 말이야.. 그래서 그냥 걸었단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몰라. 아무튼 줄창 걷기만 했으니깐, 걷다가 해가 지면 교회에도 들어가서 자고 공사장에 들어가서도 자고 그랬단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거고 이렇게 꼬마네 집에 오게도 된거지. 헤헤. 그런데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 그래, 꼬마야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 아저씨도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말이다. 아저씨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말했습니다. 혹시 핸드폰 충전기 있니..?


아이는 우리집에 핸드폰 충전기는 없으며 조금 있으면 어머니가 돌아오실 것 같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어머니가 자신을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니깐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아저씨는 다시 한 손엔 서류가방 그리고 한 손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대문을 나갔습니다. 아이는 아저씨가 서류가방을 든 쪽 어깨가 유난히 쳐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아저씨가 돌아가시고나서야 집 안에 엄청난 악취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냄새는 아이의 어머니가 오시고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도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참, 그 뒤로 3년 그러니깐 2001년 말쯤, 경제 상황은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말들이 있었고 기적적으로 IMF를 벗어났다며 긴 터널을 통과했으니 좋은 일들만 있을거라는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는 그때 그 아저씨를 만난 이 후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아이는 그 후로도 가끔씩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던 그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안그러면 이 아저씨처럼 된다는 말도..) 아이는 공부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첫 번째 수능을 보고 나오는 순간 아이는 재수를 결심했고 아이는 재수를 하면서 평소 세우지 않던 시간계획표까지 세워가며 공부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주위에서 그럭저럭 다닐만하다고 말하는 ‘서럽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아이는 지하철 일호선에 올라타면 풍기는 이름 모를 냄새와 일주일에 적어도 두 세 번정도 보게 되는 노숙자 아저씨를 보며 얼굴을 찡그립니다. 그리고 최근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청년실업이라는 말들이 아주 남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자신의 주변있는 사람들은 분주하게 뭔가를 쌓고 있었습니다. 토익, 토플이라고 불리는 책을 뒤적이며, 어학연수를 준비한다고, 인턴십이니 대외활동이니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바뻐보이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그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바닥에 차곡 차곡 쌓여있는 것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 합니다. 이게 바로 스펙이라는 것인데, 요즘 시대에는 이것을 튼튼하게 쌓아놔야 취업도 할 수 있고, 사람 구실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이의 마음 속에 와닿았습니다. 아이는 그때부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대외활동이라고 불리는 것도 시작했습니다. 학생회장같은거 하면 취업할 때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어서 학생회장도 출마했었는데 원채 남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좀 더 뻔뻔했었어야 하는 유세자리에서 우물쭈물하다 결국 낙선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요즘 다른 것을 준비중 입니다. 이제는 주말에 더 이상 동아리활동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참, 최근 공모전 동아리가 생겼다는데 유독 그 곳에만은 관심이 있는것 같기는 합니다.) 아이는 서울 근교에 있는 맹아원에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위로부터 봉사활동이야말로 강력한 스펙이 될 수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 아이는 맹아원에 가면 이를 악 물고 봉사를 했습니다. 맹아원은 아이에게 다소 빡빡한 일상을 이겨낼 수 있을만큼의 에너지를 충전해 주었습니다. 맹아원 원장님을 포함한 주위사람들은 비가오나 눈이 오나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봉사 활동을 나오는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원장님은 진정으로 봉사정신이 투철한 아이라며, 나중에 추천서나 확인서가 필요하면 꼭 오라며 칭찬했지만, 사실 아이가 이를 악 물고 봉사활동을 다녔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확인서와 같은 가시적인 자료들도 중요했지만 바로 그 냄새, 맹아원에서 풍기는 찌릿한 냄새가 그 아저씨가 다녀간 뒤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그 악취와 놀랄만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공부 열심히 안하면 이 아저씨처럼 된다.”


아이는 일주일 마다 그 냄새를 맡으며 아저씨의 말을 머리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 말은 아이의 머리 속에 “스펙 열심히 안 쌓으면 이 아저씨처럼 된다”로 바뀌어 기억되었습니다. 아이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두려운 만큼 이를 악 물었고 그만큼 열심히 스펙이란 것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엊그제 등록한 영어 회화 , 아이에게 How are you하고 인사를 건냅니다. 

 

아이는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I am fine thank you. And you?

 


 

심심해서 적어 본..

 

혹시 나도 무언가가 두려운 나머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걷는 것이 아니라 쫓기고 있는 것이겠지..?